안록산

歷史/중국 2016. 3. 16. 20:35


■안록산(安祿山) (705∼757)

중국 당나라의 장군. 돌궐족 출신. 30대에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수규(張守珪)를 섬겨 무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윽고 영주에 본거를 두는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로 발탁되었다. 해(奚), 거란(契丹), 실위(室韋), 말갈(靺鞨) 등 동북 여러 민족의 진압과 위무에 노력하여 실적을 올림과 동시에, 중앙에서 파견된 사자(使者)를 뇌물로 농락하는 일에 능하였기 때문에, 변경의 방비에 번장이 중용되는 시류를 타고, 급속히 현종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이렇게 하여 744년 범양절도사, 751년 하동절도사를 겸임함으로써, 당의 국방경비군 전체의 3분의 1에 가까운 병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반대파의 재상 양국충과 맞서 755년 범양(지금의 북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낙양에 들어가 대연황제라 칭했다. 이것이 ‘안사의 난’의 시초로, 그의 군사가 창안까지 점령했지만 둘째 아들 경서의 손에 죽고 이 난은 안록산의 부장 사사명, 사조의 부자에 옮겨져 당나라 쇠망의 원인이 되었다.

■안사의 난
천보 4년(755) 안록산(安祿山)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일찌기 안록산은 천보 원년(742) 새로 설치된 평로 절도사가되고 같은 3년에 범양(范陽) 절도사를 겸하였다. 안록산은 체중이 230근(약 200Kg, 우리 나라의 근과 다름)이나 되는 보기 드문 뚱뚱보로 그의 뚱뚱한 배는 무릎을 덮을 정도였다 한다.

양귀비는 이같은 안록산이 마음에 들었다. 익살스럽고 털털하며 모나지 않고 수수한 그의 성격을 바탕으로 안록산은 손쉽게 현종과 양귀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고 싶다고 자청하여 입궐하면 먼저 양귀비에게 인사를 올리고 다음에 현종을 배알하였다.

그 후 안록산은 수시로 군중에 출입하였으며 때로는 한 밤을 궁중에서 지새워 물러가지 않은 일이 있어 양귀비와의 추문이 널리 세상에 퍼졌건만 현종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다시 안록산에게 하동(河東) 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현종은 장안에 호화로운 주택을 지어 안록산에게 주는 등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록산이 모반을 일으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현종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고도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잇달아 들어오는 안록산의 반란보고를 들은 현종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황한 현종이 수도 장안을 수비할 병력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으나 전투를 할 만한 군사는 전무한 상태였다.

그 때 세상은 바야흐로 수십년 동안 태평 세월을 누려왔기 때문에 아무 방비가 없이 안록산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하여 낙양을 함락시켰다.
낙양을 함락시켰다고 하지만 안록산의 반란군은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각 지방이 아무 방비가 없었기 때문에 안록산의 반란군이 마음대로 진격할 수 있었으나 후에는 이곳 저곳에서 백성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반란군의 진격을 저지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안을 지키는 동쪽의 요충지 동관은 모두 안록산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현종은 친위군에게 출진 준비를 명하긴 하였으나 안록산의 반란군과 싸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밤이 새자 현종은 연추문을 열어젖히고 양귀비와 그의 자매, 황족, 측근,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무장한 천명의 친위군이 이들을 호위하여 서남쪽 촉 땅으로 향했다.

수행하던 장병들은 굶주리고 피로에 지쳐 지금까지 꾹 참아오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들은 한결같이'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재상 양국충의 잘못 때문이다'라고 분개하여 양국충의 목을 베고 이어 현종의 거처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소리높여 '양귀비를 주벌하라'고 외쳐댔다. 이들 병사들의 분노에 찬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키자 현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현종은 눈물을 삼키며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메어 죽을 것을 명하였다. 양귀비가 죽자 장병들은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길을 재촉하였다.
양귀비가 죽은후 10여일 후에 장안도 함락되었다. 현종은 오로지 촉 땅으로의 피난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연도의 백성들은 현종의 피난 행차를 가로막으며 가는 것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현종은 태자에게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이르고 자신은 계속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현종 황제에게 상황 천제라는 존호를 받들어 올리고 태자 이형(李亨)이 즉위하니 이 이가 당의 숙종(肅宗)이다. 이때가 천보 15년(75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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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ejavu-Dog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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